[XRP 3부] 에스크로에 묶인 물량, 공급 구조 읽는 법

웨일로그 편집팀

리플은 2017년에 자기가 보유한 XRP 550억 개를 XRP 레저 위의 에스크로(조건이 충족돼야 열리는 자물쇠 걸린 금고)에 스스로 넣었고, 그 금고는 매달 1일 10억 개씩 열립니다. 다만 실제로 시장에 나오는 양은 10억 개가 아닙니다. 리플이 쓰지 않은 물량을 다시 금고에 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자산의 공급을 읽으려면 “매달 10억 개 해제”라는 헤드라인이 아니라 해제량에서 재예치량을 뺀 순증가분과 그 규칙을 봐야 합니다.

이 글은 “XRP와 리플 — 발행 주체가 있는 코인” 5부작의 3부입니다. 2부에서 XRP에는 채굴도 스테이킹도 없어 신규 발행이 아예 없다는 점을 확인했습니다. 발행이 없는 자산의 공급 변화는 오직 이미 만들어진 물량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 가느냐로만 생깁니다. 그 이동의 중심에 에스크로가 있습니다.

배경: 회사가 스스로 금고를 채운 이유

XRP는 2012년에 1,000억 개가 한 번에 만들어졌고, 그중 상당 부분이 리플이라는 회사로 넘어갔습니다(1부 참고). 이 구조는 투자자에게 늘 같은 불안을 남겼습니다. 회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대량으로 팔 수 있다는 것.

리플이 2017년에 내놓은 답이 에스크로였습니다. 회사 공식 발표 “Ripple Escrows 55 Billion XRP for Supply Predictability”의 제목에 이미 목적이 적혀 있습니다. 공급의 예측 가능성(supply predictability)을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온체인 분석업체 Coin Metrics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 예치는 2017년 12월 16일에 이뤄졌고, 규모는 총량의 55%인 550억 XRP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약속했다”가 아니라 “원장 규칙으로 강제했다”는 점입니다. 리플이 마음을 바꿔도 만료 시각 전에는 열 수 없습니다. 회사의 선의가 아니라 합의 알고리즘이 잠금을 지킵니다.

에스크로는 어떻게 작동하나

XRP 레저의 에스크로는 스마트컨트랙트라기보다 원장에 기록되는 하나의 객체입니다. 구조는 단순합니다.

  • EscrowCreate — 보내는 계정, 받는 계정, 금액, 그리고 “언제부터 열 수 있는지”(FinishAfter)를 지정해 금고를 만듭니다. 이 순간 해당 XRP는 보내는 계정의 잔액에서 빠지고 원장 위의 별도 객체로 옮겨집니다.
  • EscrowFinish — 지정 시각이 지나면 금고를 열어 받는 계정으로 옮깁니다. 시간 조건형 에스크로는 아무나 이 트랜잭션을 낼 수 있습니다. 리플이 잊고 있어도 제3자가 열 수 있다는 뜻입니다.
  • EscrowCancel — 취소 조건이 걸린 경우에만 원래 계정으로 되돌립니다.

리플이 만든 것은 이 중 시간 조건형입니다. xrpl.org에 2017년 올라온 공식 설명 글에 따르면 매달 1일 만료되는 10억 개짜리 계약을 55개 만드는 것이 원안이었고, 실제 구현은 2018년 1월부터 2020년 1월까지 매달 만료되는 10억 개짜리 계약 25개, 그리고 2020년 2월부터 2022년 7월까지 매달 두 개씩 만료되는 5억 개짜리 계약 60개로 나뉘었습니다. 25억 + 30억, 합쳐서 550억 개입니다.

매달 10억 개가 풀린다는 말의 진짜 의미

같은 공식 설명 글에 핵심 장치가 하나 더 있습니다. 쓰지 않은 물량은 큐의 맨 뒤에 새 에스크로로 다시 넣는다는 것. 예컨대 첫 달에 5억 개를 안 썼다면 그 5억 개는 55개월째에 만료되는 새 금고로 들어갑니다.

이 재예치 때문에 잠금 기간은 계속 뒤로 밀립니다. 2017년 계산으로는 2022년에 끝날 일정이었지만, 매달 대부분이 다시 잠기면서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55개월 뒤 전부 풀린다”는 서술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투자자가 실제로 봐야 할 숫자는 따라서 하나뿐입니다.

순증가분 = 그달 해제량 − 그달 재예치량

2026년 8월 1일에 실제로 일어난 일

이 글을 쓰는 시점의 가장 최근 회차를 보겠습니다. 2026년 8월 1일 회차에 대해 복수 매체가 보도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순서 트랜잭션 수량
1 재예치 2억 XRP
2 재예치 5억 XRP
3 해제 (1차) 5억 XRP
4 해제 (2차) 3억 XRP
5 해제 (3차) 2억 XRP
순증가분 3억 XRP

총 10억 개가 풀렸지만 7억 개가 먼저 다시 잠겼으므로 순증가분은 3억 개입니다. 보도에서 특히 짚은 대목은 순서였습니다. 평소에는 해제한 뒤 남은 물량을 나중에 재예치하는데, 이번에는 잠그는 쪽을 먼저 실행했습니다. 여러 매체가 이를 기록상 가장 낮은 수준의 순 해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선을 하나 그어 두겠습니다. 순증가분이 적다는 사실이 시세에 무엇을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같은 사건을 두고 “매도 압력 감소”와 “계절적 약세 지속”이라는 정반대 해석이 같은 주에 함께 나왔습니다. 이 숫자로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달에 회사 손으로 새로 넘어간 물량이 얼마인가. 다음 회차는 2026년 9월 1일입니다.

쟁점: 매도 압력인가, 예측 가능성인가

에스크로를 보는 시각은 오래전부터 둘로 갈려 있습니다. 양쪽 논거를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결국 매도 압력이다” 쪽의 논거는 이렇습니다. 잠겨 있든 아니든 그 물량은 언젠가 시장에 나올 예정이고, 발행 주체가 매달 정기적으로 물량을 푸는 자산은 그렇지 않은 자산과 구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순증가분이 매달 수억 개씩 쌓이면 누적으로는 결코 작지 않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오히려 예측 가능성이다” 쪽의 논거는 이렇습니다. 회사가 대량 보유한다는 사실 자체는 에스크로가 있든 없든 변하지 않는데, 에스크로는 그 물량이 한 번에 쏟아질 수 없도록 상한을 걸어 둔 장치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일정과 수량이 전부 원장에 공개돼 있어 누구나 미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발행 주체가 있는 다른 프로젝트 상당수는 이런 강제 장치조차 없습니다.

웨일로그의 시각을 덧붙이면, 이 논쟁은 판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진술이 모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스크로는 “회사가 물량을 많이 갖고 있다”는 위험을 없애는 장치가 아니라 그 위험의 속도에 상한을 씌운 장치입니다. 상한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고, 그럼에도 물량이 계속 나온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투자자가 할 일은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매달 실제 순증가분을 확인해 상한이 지켜지고 있는지 스스로 검산하는 것입니다.

잔여 물량: 이 글에서 단정하지 않는 숫자

여기서 솔직하게 적어 둘 것이 있습니다. 작성 시점 기준 에스크로에 남은 정확한 잔여 물량은 이 글에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2차 매체의 숫자가 서로 맞지 않습니다. 같은 2026년을 다루면서도 어떤 기사는 “320억 개 이상”, 어떤 기사는 “350억에서 380억 개 사이”, 또 어떤 기사는 “2026년 6월 기준 381억 5,000만 개”라고 적고 있습니다. 편차가 60억 개에 이릅니다. 이 정도 차이는 반올림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세었는지가 서로 다르다는 신호입니다. 회사 계정 잔액을 포함했는지, 특정 계정만 봤는지, 언제 시점인지가 기사마다 다릅니다.

둘째, 회사가 내주던 정기 자료가 끊겼습니다. 리플은 2017년부터 분기별 XRP 마켓 리포트로 자사 보유량과 에스크로 잔액을 공개해 왔는데, 2025년 5월 기존 형식의 리포트를 중단하고 형태를 바꾸겠다고 밝힌 것으로 보도됐습니다(CoinDesk, 2025년 5월 6일). 검색으로 확인되는 마지막 정규 리포트는 2025년 1분기분이고, 그 이후 같은 형식의 분기 리포트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1부에서 짚은 문제가 그대로 재현된 사례입니다. 비상장 회사는 스스로 공개하기로 한 만큼만 보여 주고, 공개를 멈추는 것도 회사의 선택입니다. 그러니 잔여 물량 같은 핵심 숫자를 남의 기사에 의존하는 습관은 이 자산에서 특히 위험합니다.

온체인에서 직접 확인하는 방법

다행히 에스크로는 원장 객체이므로 누구나 직접 셀 수 있습니다. 순서는 이렇습니다.

  1. 총량과 유통량을 구분한다. 에스크로에 묶인 XRP는 총 발행량에는 들어가지만 유통량에서는 빠집니다. 시가총액을 볼 때 이 차이가 그대로 반영되므로 시가총액과 FDV의 차이를 먼저 이해하고 봐야 합니다.
  2. 블록 익스플로러에서 계정을 연다. 리플 관련 계정 주소를 넣으면 잔액과 함께 그 계정이 소유한 에스크로 객체 목록이 나옵니다. 조회 방법 자체는 블록 익스플로러 활용법에 정리해 둔 절차와 같습니다.
  3. 만료 시각을 본다. 각 에스크로 객체에는 열 수 있는 시각이 박혀 있습니다. 앞으로 몇 달치가 어떤 수량으로 걸려 있는지 목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4. 매달 1일 전후의 트랜잭션을 본다. 해제(EscrowFinish)와 재예치(EscrowCreate)가 같은 날 섞여 나오므로, 둘을 모두 세야 순증가분이 나옵니다. 해제만 세면 매달 10억 개라는 잘못된 결론이 나옵니다.
  5. 한 계정만 보고 결론 내지 않는다. 리플의 물량은 여러 계정에 나뉘어 있습니다. 잔여 총액을 말하려면 어떤 계정들을 합산했는지를 함께 밝혀야 하며, 그러지 않은 숫자는 출처가 있어도 검증할 수 없습니다.

이 회차가 남기는 것

XRP를 사든 사지 않든 여기서 챙겨 갈 개념은 하나입니다. 발행 주체가 대량 보유한 코인에서는 “총 발행량”이 거의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 물량이 어떤 장치로 묶여 있고, 그 장치가 원장 규칙으로 강제되는지 아니면 회사의 약속에 불과한지, 그리고 매달 실제로 얼마가 풀리는지입니다.

이 세 가지를 확인할 수 없는 프로젝트라면, 백서에 적힌 배분 계획표는 그림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XRP처럼 원장에서 직접 셀 수 있는 경우라면, 남의 요약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직접 세는 편이 빠르고 정확합니다.

다음 4부에서는 공급이 아니라 수요 쪽을 봅니다. “은행들이 XRP를 쓴다”는 통설이 실제 구조에서 어디까지 사실인지, 제휴 발표와 실사용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다룹니다.

1차 자료 확인처: 리플 공식 발표 “Ripple Escrows 55 Billion XRP for Supply Predictability”(ripple.com), 에스크로 구현 방식은 xrpl.org 공식 설명 글 “An Explanation of Ripple’s XRP Escrow”(2017)와 EscrowCreate·EscrowFinish 프로토콜 문서, 최초 예치 시점은 Coin Metrics의 온체인 분석, 분기 리포트 중단 보도는 CoinDesk(2025년 5월 6일), 2026년 8월 1일 해제·재예치 내역은 복수 매체 보도(u.today, bitcoinist, 99bitcoins 등)를 교차 확인했습니다. 잔여 에스크로 총액은 자료 간 불일치로 본문에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정보 제공 목적으로 작성되었으며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